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제프 슈트라우스 (문단 편집) == 생애 ==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빈(오스트리아)|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취미 혹은 교양 삼아 음악 이론과 [[바이올린]] 연주법 등을 배웠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1세|아버지]]는 그를 [[군인]]으로 키우려고 했다. 하지만 군 생활을 견디기에는 몸이 약한 편이었고, 대신 [[수학]]과 [[공학]]을 전공해 공학 설계사로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형이나 동생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몰래 계속 음악을 배웠다. 빈 시청과 관련된 일을 하며 거리 청소용 마차 등 몇 가지 발명품을 고안했고, 두 권의 수학 참고서를 내기도 했다. 공학자 및 음악가 이외에도 화가, 극작가, 가수로서도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형인 요한 2세가 무도음악 작곡가로 막 데뷰했을 때도 아직 본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1853년에 형이 신경쇠약 진단을 받고 치료와 요양을 위해 잠시 활동을 중단하게 되자 형과 어머니 마리아 안나 슈트라임에게 악단 지휘를 대신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약간 얼떨떨하게 사교계에 데뷰했다. 요제프는 별로 내키지도 않았고, 어차피 형의 대리였던 만큼 그냥 이번만 하고 관두자고 생각해서 자신이 데뷰 무대에서 발표한 첫 왈츠에도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의외로 호응도 좋았고 적성에도 잘 맞았는지, 이내 형의 명성에 버금가는 경음악 작곡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이듬해 작곡한 자신의 두 번째 왈츠에는 '마지막 이후 처음'이라는 은퇴 번복의 뉘앙스를 담은 제목을 붙여 발표했다.] 예전 직업 덕분에 공대나 산업체, 상공회의소 등에서 주최하는 무도회나 음악회의 작품 의뢰를 많이 받았는데, 공학도였던 것과는 반대로 시적이고 감수성 넘치는 곡들을 많이 만들어 젊은 층에서 특히 선호하는 작곡가로 꼽혔다. 그래서 왈츠나 폴카 마주르카 같이 다소 완만한 템포에 선율미가 두드러지는 춤곡에서 특히 명작이 많다. 심지어 요한 2세가 '나랑 막내(에두아르트)보다도 더 재능이 많다' 며 부러워했을 정도다. 출판된 것만 총 283곡의 춤곡과 [[행진곡]] 등을 남겼는데, 자작곡 외에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 편곡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수백 곡이나 되는 편곡물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막내인 에두아르트의 [[삽질]]로 인해 대부분의 원고가 잿더미가 되는 바람에, 현재 남겨진 편곡물은 극히 적다.[* 에두아르트는 큰형인 요한 2세가 죽고 몇 년뒤 악단을 해체하면서 형들이 남긴 자필보 상당수를 소각시켜 버렸다. 자신들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라는 사유였다.] 하지만 형에 맞먹는 격무 때문에 가뜩이나 병약했던 몸 상태가 점점 더 안좋아지게 되었고, 1870년에 [[폴란드]]에서 순회 공연 중 무대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악단은 즉시 공연을 중단하고 빈으로 되돌아왔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폴란드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온갖 뜬소문이 떠도는 바람에 사인에 관한 [[음모론]]이 돌기도 했는데, 가장 황당한 것은 만취한 [[러시아군]] 병사의 구타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뜬소문일 뿐이었지만, 유가족들이 사인을 공표하지 않고 경찰 당국의 검시까지 거부하는 바람에 오히려 의혹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임종 순간을 지켜봤거나 장례/매장에 관여한 인물들의 증언으로는 몸에 구타 흔적이 하나도 없었고, 과로사임이 확실하다고 한다. 시신은 장크트 마르크스 묘지에 묻혔으나, 나중에 다시 발굴되어 형과 동생을 비롯한 가족들이 묻혀있는 빈 중앙묘지로 옮겨져 어머니 안나의 묘소 옆에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